·
careerlife

실력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흔들렸던 이유

스타트업에서 9년. 번아웃도 왔고, 이직 준비도 했다. 근데 결국 대기업에 가지 않았다.

동료들은 나를 칭찬했다.

“코드 짜는 거 보면 진짜 실력자야."
"이런 구조 설계는 네가 제일 잘해."
"네카라쿠배 가도 되는데 왜 여기 있어?”

마지막 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칭찬인지 물음표인지 알 수 없는 그 문장. 나도 그게 궁금했으니까.


스타트업에 오래 있으면 이상한 감각이 생긴다. 기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뭔가 증명이 안 된 것 같은 느낌. 이력서에 큰 회사 로고가 없을 때 드는 그 묘한 찜찜함.

학부 때 창업으로 시작했다. 그다음 스타트업,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6년, 지금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1년째다. 도합 9년이 됐다. 한 번도 대기업에 가지 않았다.

6년을 보낸 그 스타트업에서는 처음엔 세 명이었던 팀이 점점 커졌고, 나는 개발자에서 팀장이 됐다. 인프라를 바닥부터 쌓았고, CI/CD를 설계했고, 분산 시스템을 다뤘다. QA 시간 90% 줄이고, 배포 리소스도 그만큼 줄였다. 숫자로 기록할 수 있는 성과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따금 LinkedIn에서 “네이버 시니어 개발자”, “카카오 테크 리드” 같은 프로필을 볼 때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023년에 번아웃이 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5월에 한 번, 회복했다고 생각했는데 10월에 또 왔다.

원인은 비즈니스였다.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더 많은 아웃풋, 더 높은 성과를 계속 밀어붙였다. 나도 그 기준에 맞추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쳐서 생각을 멈추고 그냥 하루하루를 견뎠다.

번아웃이 오면 모든 게 의심스러워진다. 실력도, 선택도, 방향도.

나는 진짜 실력이 없어서 여기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이 의심은 실력에서 온 게 아니었다. 그 회사 동료들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많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자랐다. 인정받았고, 성장했고, 그게 좋았다. 무너진 건 내 실력이 아니라,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견디는 힘이었다.

하지만 번아웃 한가운데서는 그게 구분이 안 된다. 일이 안 풀리는 게 내 탓 같고, 그러다 보면 결국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내가 걸어온 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그 의심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어떤 테크트리를 타왔는지로 이어진다.


나는 스타트업 전에 외주를 해왔다. 1인 팀이었다. 누군가에게 일을 넘기거나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frontend, backend, devops, 아키텍처까지 — 전 영역을 다루는 건 선택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교만했다. full-stack이라는 단어에 뽕이 단단히 차 있었다. frontend만 하는 사람, backend만 하는 사람보다 내가 더 넓은 세계를 알고 있고, 전체를 연결하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specialist들이 못 보는 걸 나는 본다는 착각. 지금 그 시절의 나를 마주치면 조용히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그 착각은 뛰어난 인재들이 있는 스타트업에 들어가면서 천천히 깨졌다. 각 분야를 정말 깊이 파고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알던 ‘연결’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가 보였다. 그 안에서 많이 배웠고, 많이 깨졌고, 그게 좋았다.

깨지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내가 겉멋만 든 사람이었다는 거였다. 빈수레가 요란했던 거다. 그것도 아주 우렁차게. 겉으로만 넓었지 깊이가 없었다. 그때부터 기본을 다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 쓰던 것들의 원리부터 다시 팠다.

그래도 스타트업이라는 환경은 나를 generalist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필요한 곳에 손을 뻗어야 했다. 인원이 부족한 팀에서 여유가 조금이라도 남는 사람이 필요한 걸 배워서 하는 것 — 나는 그게 제품 중심적으로 일한다는 것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포지션의 경계보다 제품의 완성이 먼저인 사람. 이번엔 얕게 넓은 게 아니라, 각 영역의 본질을 조금씩 알면서 연결하는 사람. 더 단단한 generalist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스스로는 단단해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바깥의 기준은 여전히 나를 애매한 자리에 세워뒀다.

실제로 상용 서비스를 출시하고, 월 수십만~백만 단위의 트래픽을 다뤄본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이 기대하는 규모는 달랐다. 수천만 유저, 수백 개의 마이크로서비스, 조직 전체를 흔드는 장애 대응 경험. 거기에 대기업들은 갈수록 specialist를 원하는 분위기였다. 특정 도메인을 깊게 판 사람. 나는 그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애매한 사람이었다.

‘product engineer’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제품 전체를 보면서 필요한 걸 만드는 사람. 사실 이 단어가 보편화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커리어를 시작하던 시절엔 비슷한 역할을 ‘fullstack engineer’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건 종종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 즉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로 들리기도 했다. 한때는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specialist가 못 되는 것에 대한 합리화인지 —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스타트업 9년이 쌓인 경력인지, 아니면 그냥 정체된 9년인지. 동료들의 칭찬이 진심인지, 아니면 작은 연못의 기준인지. 그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자 멈추질 않았다.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내가 선택을 한 건지, 아니면 그냥 못 간 건지.


네이버 면접을 넣었다.

기술 면접을 통과했다. 분산 시스템, 알고리즘, 설계 문제들. 준비한 만큼 답할 수 있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최종 임원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관이 물었다. “팀원들과 협업이 안 되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팀 분위기도 무기력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습니다. 그런데도 답이 안 보이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면 — 그때는 팀을 옮기겠습니다.”

나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타트업에서만 9년을 보낸 나한테 그건 너무 당연한 결론이었다.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그래도 맞지 않으면 바꾼다. 팀도, 방향도, 환경도.

나중에 내부 사람에게 들었다. “그렇게 대답하면 안 돼.”

대기업 임원이 원했던 건 달랐다. 팀 안에서 버티고, 설득하고, 조율하는 사람. 조직의 문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그게 그쪽 문화에서 “좋은 시니어”의 모습이었다.

근데 나는 그 답을 못 했다. 못 한 게 아니라 — 그게 맞는 답이라고 생각이 안 됐다.

그때 알았다. 기술 면접은 통과했는데 나는 이미 대기업 사람이 아니었다. 스타트업 9년이 내 사고방식을 너무 많이 바꿔놨던 거다. 자유롭게 결정하고, 직접 실행하고, 맞지 않으면 바꾸는 방식이 내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선택이 이미 일어나 있었던 거다.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그 회사들에 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그 뒤로 더 이상 도전하지 않았다. 국내 네카라쿠배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네이버에서 그걸 느꼈으니까. 정점이라 불리는 곳에서조차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구나”가 분명해지자, ‘빅테크’라는 간판 자체에 더 갈 마음이 사라졌다. 확인할 건 확인했고,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돌아보면 빅테크 구조는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큰 조직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는 것보다, 작은 팀에서 내가 설계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방식이 더 맞았다. 복잡한 걸 단순하게 만드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 복잡함이 내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선택한 거야”와 “나는 못 간 거야”는 겉으로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을 구분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다.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product engineer는 합리화로 택한 단어가 아니다. 내가 가장 에너지를 얻는 방식 — 기술로 제품을 만들고, 문제를 풀고, 그게 실제로 쓰이는 것을 보는 것 — 이 단어가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스타트업에서 Product Team Lead를 하고 있다. 여전히 불확실성이 있고, 여전히 증명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근데 더 이상 LinkedIn 피드 보면서 찜찜하지 않다. 정확히는 — 그 찜찜함이 뭔지 이해하게 됐다. 경력에 대한 결핍이 아니라, 내가 내 선택을 스스로 믿지 못했던 것이었다.

“네카라 가도 되는데 왜 여기 있어?” 라는 질문을 이제는 다르게 듣는다.

예전엔 이 질문 앞에서 작아졌다. 굳이 답을 증명할 필요도, 방법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증명하고 싶어졌고, 그게 가능한 시대가 됐다.


9년 동안 generalist라는 말이 가끔은 부끄러웠다. specialist보다 얕다는 뉘앙스가 따라왔고, 나 스스로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폭이 무기가 되는 시대가 됐다. 특정 기술을 깊게 파는 일은 점점 도구가 대신한다. 대신 제품 전체를 보는 시야, 도메인을 읽는 감각, 기술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능력 — 9년 동안 넓게 쌓아온 그 폭이, 이제는 약점이 아니라 레버리지가 된다.

거기에 LLM을 얹으면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예전 같으면 팀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을, 이제는 내가 쌓아온 경험과 넓은 지식 위에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때가 온 거다.

그래서 더 이상 누가 알아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보여주면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제대로 풀어보고 싶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력 있다는 말은 듣는데 대형 로고가 없어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사람.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

그 흔들림이 실력 때문인지 선택 때문인지, 직접 확인해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나도 한참 걸렸다.

댓글